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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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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이 11세는 1461년부터 1483년까지 프랑스를 통치한 왕이다. 그는 샤를 7세의 중앙 집권화 정책을 계승하여 백년 전쟁 이후 황폐해진 프랑스를 통일하는 데 기여했다. 루이 11세는 외교와 정치적 음모를 통해 영토를 확장하고 국내 평화를 유지했으며, 상업과 산업을 장려하고 우편 시스템을 구축하는 등 프랑스 근대화에 기여했다. 그는 부르고뉴 공작과의 갈등을 겪었으며, 잉글랜드와의 백년 전쟁을 종결시키는 데도 관여했다. 루이 11세는 사보이의 샤를로트와 결혼하여 샤를 8세, 안 드 프랑스 등을 자녀로 두었으며, 1483년 사망 후 클레리-생트-앙드레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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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루이 11세, 생 미셸 기사단 목걸이 착용, 1469년경
루이 11세, 생 미셸 기사단 목걸이 착용, 1469년경
통치 기간1461년 7월 22일 - 1483년 8월 30일
대관식1461년 8월 15일, 랭스
계승프랑스 왕
스타일더 보기...
이전 통치자샤를 7세
다음 통치자샤를 8세
배우자스코틀랜드의 마거릿 (1436년 6월 25일 결혼, 1445년 8월 16일 사망)
샤를로트 드 사보이 (1451년 2월 14일 결혼)
자녀
잔, 프랑스의 여왕
샤를 8세
왕가발루아
아버지샤를 7세
어머니마리 당주
출생일1423년 7월 3일
출생지부르주, 베리, 프랑스
사망일1483년 8월 30일
사망지플레시레투르 성, 프랑스
매장일1483년 9월 6일
매장지클레리 성모 교회, 클레리생탕드레
서명
별칭(신중한 자)
(교활한 자)
(보편적인 거미)

2. 유년 시절과 결혼

장 푸케의 이 그림에서 루이의 아버지 샤를 7세동방 박사 중 한 명으로 묘사되었고, 당시 도팽이었던 루이는 나머지 두 명 중 한 명으로 추정된다.


루이는 1423년 7월 3일 부르주에서 프랑스샤를 7세와 마리 당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프랑스는 백년 전쟁 중이었고, 영국파리를 포함한 북부 지역을 점령하여 샤를 7세의 통치력은 중부와 남부에 한정되어 있었다. 루이의 할머니인 아라곤의 욜랑드는 프랑스에서 영국 세력을 몰아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루이가 태어난 직후 프랑스군은 크라방 전투에서 영국군에게 크게 패배하는 등 어려운 시기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부르고뉴 연합군이 부르주를 잠시 습격하기도 했다.

루이의 할아버지 샤를 6세 시대부터 중앙 정부의 힘이 약해 부르고뉴 공국을 비롯한 여러 공국들이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선량공 필리프가 다스리던 부르고뉴 공국은 영토를 크게 확장하며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했고, 백년 전쟁 중에는 영국과 동맹을 맺어 프랑스 왕실과 대립했다.

1429년, 어린 루이는 로슈에서 잔 다르크를 만났는데, 그녀는 오를레앙 공방전에서 승리하며 백년 전쟁의 전환점을 마련했다. 잔 다르크는 이후 자르조 전투와 파테 전투에서도 승리했다. 그녀의 사후 파리가 수복되었고, 루이는 1437년 아버지와 함께 파리에 입성했다. 하지만 루이는 프랑스의 약한 국력을 보며 성장했고, 아버지 샤를 7세를 나약하게 여겨 경멸하게 되었다.

스코틀랜드의 공주 마가렛


1436년 6월 24일, 루이는 아버지 샤를 7세가 외교적 이유로 선택한 스코틀랜드의 공주 마가렛을 만났다. 그녀는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1세의 딸이었다. 두 사람의 첫인상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루이는 의례적으로 결혼에 임한 것으로 보인다. 결혼식은 1436년 6월 25일 투르 성 예배당에서 랭스 대주교 레노 드 샤르트르의 주례로 소박하게 치러졌다. 당시 12세였던 루이는 11세의 신부 마가렛보다 성숙해 보였다. 샤를 7세는 평상복 차림으로 참석할 정도로 격식을 차리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 왕실의 재정 형편이 어려워 스코틀랜드 사절단은 피로연 직후 서둘러 돌아가야 했고, 이는 스코틀랜드 측에 모욕감을 주었다.

사보이의 샤를로트


결혼 후 두 사람은 나이가 어려 바로 합방하지 않았고, 마가렛은 학업을 이어갔으며 루이는 아버지와 함께 영지를 순회했다. 이 시기 루이는 왕세자를 의미하는 도팽으로 책봉되었다. 아름답고 교양 있던 마가렛은 프랑스 궁정에서 인기가 있었지만, 루이와의 결혼 생활은 불행했으며, 1445년 20세의 나이로 자녀 없이 사망했다.

1440년, 16세의 루이는 아버지를 몰아내고 자신이 섭정이 되려 한 귀족들의 반란인 프라게리에 가담했다. 반란은 실패했고 루이는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해야 했다. 이 반란에서 루이는 부르봉 공작 샤를 1세 등의 영향을 받았으나, 반란군은 왕군에 비해 열세였고 결국 루이는 파리로 후퇴해야 했다. 이 사건은 루이에게 중요한 정치적 교훈을 주었다. 제임스 클러는 "다른 강인한 소년들처럼, 그는 마침내 단순한 허세만으로는 모든 것을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왕자로서도 왕으로서도 그 교훈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생애가 끝날 때까지 그러한 위험을 감수하고 싶은 유혹을 끊임없이 받았지만, 성찰 없이 순수한 충동에 따라 행동한 적은 결코 없었다."고 평가했다.

도팽 시절 루이 11세가 그르노블 주교에게 보낸 편지 (1444년 12월 30일)


1444년 루이는 에코르셰르(용병 부대)를 이끌고 성 야코브 안 데어 비르 전투에서 스위스군과 싸웠다. 그는 한 차례 승리 후 평화를 모색했으나 원래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다.

루이는 아버지 샤를 7세와 계속 갈등했으며, 특히 아버지의 총애를 받던 아녜스 소렐에게 무례하게 군 일 등으로 인해 1446년 궁정에서 쫓겨나 자신의 영지인 도피네로 보내졌다. 루이는 그르노블에 머물며 사실상 독립적인 통치자처럼 행세했고, 아버지의 소환에도 응하지 않으며 부자 관계는 완전히 틀어졌다. 1451년 2월 14일, 첫 부인 마가렛이 사망한 지 6년 후, 루이는 아버지의 동의 없이 8세의 사보이의 샤를로트와 재혼했다. 이는 사보이아 공국과의 전략적 결합이었으며, 훗날 이탈리아 문제에 대한 프랑스의 개입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결국 1456년 8월, 샤를 7세가 군대를 보내자 루이는 부르고뉴 공국으로 도망쳐 선량공 필리프의 보호 아래 제나페 성에 머물게 되었다. 샤를 7세는 아들을 넘기라는 요구를 필리프 공작이 거절하자 격노하며 "닭을 잡아먹을 여우를 숨겨주고 있다"고 비난했다.

3. 왕위 계승 및 통치

루이 11세의 파리 입성 - 15세기 몽스트렐레의 연대기 사본(파리 제국 도서관)의 세밀화 복제본


1461년 아버지 샤를 7세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은 루이는 동생 베리 공작 샤를의 왕위 계승 시도를 우려하여 서둘러 랭스에서 대관식을 치르고 7월 22일 프랑스 왕위에 올랐다. 왕이 되기 전인 1439년과 1448년에는 부왕의 퇴위를 꾀하기도 했다.[2] 1436년 스코틀랜드의 마거릿 스튜어트와 첫 결혼을 했고, 그녀 사후 1451년 샤를로트 드 사부아와 재혼했다.

루이 11세는 아버지의 정책을 이어받아 프랑스 귀족들의 권력을 제한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주력했으며,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세금 제도를 효율적으로 개혁하고, 신분보다는 능력을 중시하여 자크 쾨르의 측근 등 유능한 인재를 등용했으며, 귀족들이 상업에 종사하는 것을 허용했다. 또한 불필요한 관직을 폐지하여 행정 효율성을 높였다.

재위 기간 동안 프랑스 전역을 순회하며 지방 행정을 감독하고 경제 활성화를 도모했다. 특히 1464년 구축한 왕실 우편 도로 시스템은 프랑스 전역의 신속한 정보 전달을 가능하게 하여 중앙 집권 강화에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그의 치밀한 통치 방식 때문에 "도처에 있는 거미"(l'universelle araigne|뤼니베르셀 아레뉴프랑스어)라는 별명을 얻었다.[2]

왕위에 오른 후 루이는 검소한 생활을 하며 평민이나 상인들과도 어울렸고, 필리프 드 코민 등 능력 있는 조언자들을 곁에 두었다.[4] 그의 통치 방식과 개혁은 프랑스 부르주아 계급 성장의 토대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교회 문제에 있어서는 1461년 부르주 실용 제재를 폐지했으나, 1472년 교황 피우스 2세와의 앙부아즈 협약을 통해 국왕의 성직록 임명권을 확보하며 갈리카니즘 발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루이 11세 통치의 핵심 과제 중 하나는 강력한 제후 세력, 특히 부르고뉴 공국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1462년 아라곤 왕국으로부터 루시용과 세르다뉴를 할양받았고[3],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과는 10년 이상 치열한 정치적, 군사적 대립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공익 동맹과의 전투, 리에주 반란 개입 시도와 실패 등 여러 위기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스위스와의 동맹을 통해 결정적인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고, 1477년 낭시 전투에서 샤를이 전사하면서 부르고뉴 공국은 크게 약화되었다. 1482년 아라스 조약으로 부르고뉴 영토 대부분을 왕령에 편입하고, 이후 앙주, 메인, 프로방스 등을 병합하여 프랑스 통일의 기반을 다졌다.

사후에는 오를레앙 근교의 클레리생앙드레 수도회 교회에 묻혔다.

3. 1. 부르고뉴 공작과의 갈등

루이 11세가 왕위에 오를 당시 부르고뉴 공작은 선량공 필리프였다. 필리프 3세는 오스만 제국에 맞서는 십자군을 일으키려 했으나 자금이 부족했다. 루이 11세는 십자군 자금 지원을 명목으로 40만 금 크라운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피카르디아미앵 등 여러 영토를 넘겨받았다. 하지만 필리프 3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용담공 샤를(당시 샤롤레 백작)은 이 거래에 강하게 반발하며 자신의 상속 재산이 침해당했다고 여겼다. 그는 루이 11세의 동생인 베리 공작 샤를이 주도한 귀족 반란인 공익 동맹에 가담했다. 공익 동맹군은 전투에서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루이 11세 역시 몽틀레리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여 불리한 조건으로 평화 조약을 맺어야 했다.

1467년, 샤롤레 백작이 샤를 1세("용담공")로 부르고뉴 공작위를 계승하자, 그는 부르고뉴를 독립적인 왕국으로 만들려는 야심을 드러냈다. 그러나 루이 11세가 추진하는 강력한 중앙 집권 정책은 부르고뉴 공작이 이전처럼 독자적으로 행동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부르고뉴 공국 내에서도 여러 문제와 반란이 발생했는데, 특히 리에주 시민들은 부르고뉴 공작에 대항하여 리에주 전쟁을 일으켰다. 루이 11세는 초기에는 리에주 시민들과 동맹 관계를 맺었다.

1468년, 루이 11세와 용담공 샤를은 페론에서 회담을 가졌다. 그러나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리에주 시민들이 다시 봉기하여 부르고뉴 총독을 살해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격분한 샤를은 루이 11세를 사실상 감금 상태에 두었고, 루이는 굴욕적인 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과거 필리프 3세에게서 얻었던 영토 상당수를 포기하고, 리에주와의 동맹을 파기하며, 샤를이 리에주 봉기를 진압하는 것을 돕겠다고 맹세해야 했다. 루이는 이후 샤를의 군대가 리에주를 포위하고 수백 명을 학살하는 참혹한 광경을 지켜봐야만 했다.

하지만 샤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자마자 루이 11세는 페론 조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군대를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부르고뉴 공국을 완전히 해체하는 것이었다. 중앙 집권 국가를 꿈꾸는 루이에게 부르고뉴 공작과 같은 강력한 봉건 제후의 존재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1472년, 양측 간에 다시 전쟁이 발발했다. 용담공 샤를은 보베 등 여러 도시를 포위했지만 공략에 실패했고, 특히 보베 포위전은 1472년 7월 22일 부르고뉴 군의 철수로 끝났다. 결국 샤를은 평화를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에 부르고뉴 공작의 가신이었던 필리프 드 코민은 루이 11세에게 귀순하여 그의 측근이 되었다.[4]

한편, 루이 11세는 1469년에 성 미카엘 훈장을 창설했다. 이는 샤를의 아버지 필리프 3세가 만든 권위 있는 부르고뉴의 금양모 훈장에 대항하고, 과거 프랑스 국왕 장 2세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가터 훈장을 모방하여 별 훈장을 만들었던 것처럼, 프랑스 왕실의 위상을 높이려는 의도였다.

부르고뉴 전쟁 이후 부르고뉴 영토(주황색/노란색)와 프랑스 경계(빨간색).


루이 11세는 아버지 샤를 7세처럼 통치 기간 대부분을 부르고뉴 공작과의 정치적, 군사적 대립에 쏟았다. 그는 군사력으로 명성이 높았던 스위스인들을 고용했으며, 과거 생 자코브 안 데어 비르 전투에서 그들의 전투력을 직접 확인한 바 있었다.

용담공 샤를이 스위스를 침공하면서 부르고뉴 전쟁이 발발했다. 이는 샤를에게 치명적인 실수였다. 1476년 3월 2일 그랑송 전투와 같은 해 6월 22일 무르텐 전투에서 스위스 군대는 연이어 부르고뉴 군을 격파했다. 결국 샤를은 1477년 1월 5일 낭시 전투에서 전사했고, 이로써 부르고뉴 전쟁은 막을 내렸다.

루이 11세는 마침내 최대의 정적인 용담공 샤를의 몰락을 지켜보았다. 여전히 봉건적 질서를 선호하던 다른 대영주들도 루이의 권위에 복종하게 되었다. 네무르 공작 자크 다르마냐크와 같이 저항하던 귀족들은 처형되었다. 루이의 증조부 장 2세가 그의 아들 용담공 필리프를 위해 만들어 주었던 부르고뉴 공국의 영토는 1482년 아라스 조약을 통해 대부분 프랑스 왕령으로 편입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루이 11세는 프랑스 왕국의 통일 기반을 확고히 다졌다. 그의 적들은 그가 펼치는 치밀하고 때로는 무자비한 권모술수를 보고 "도처에 있는 거미"(l'universelle araigne|뤼니베르셀 아레뉴프랑스어)라는 별명을 붙였다.[2]

3. 2. 잉글랜드와의 관계

루이 11세는 1436년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1세의 딸 마거릿 스튜어트와 결혼하면서 브리튼 섬의 정치에 관심을 가졌다. 당시 프랑스와 경쟁 관계에 있던 부르고뉴 공국이 잉글랜드의 장미 전쟁에서 요크 가문을 지지하자, 루이 11세는 이에 맞서 랭커스터 왕가 출신의 왕 헨리 6세를 지원하며 잉글랜드 내정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와 부르고뉴가 서로 대립하는 동안 잉글랜드에서는 장미 전쟁이라는 치열한 내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루이 11세는 이 전쟁에 깊은 관심을 보였는데, 특히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이 헨리 6세에게 반기를 든 요크 가문과 동맹을 맺었기 때문이다. 요크 왕가의 에드워드 4세를 왕위에 올리는 데 공을 세웠던 워릭 백작이 에드워드 4세와 관계가 틀어지자, 루이 11세는 워릭 백작에게 프랑스 망명처를 제공하며 그를 포섭했다. 루이 11세의 외교적 중재를 통해 워릭 백작은 과거의 숙적이었던 랭커스터 왕가의 마거릿 오브 앙주(헨리 6세의 왕비)와 동맹을 맺고, 그녀의 남편 헨리 6세를 다시 왕위에 앉히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성공을 거두어 1470년, 에드워드 4세는 잉글랜드에서 쫓겨나 망명길에 올랐다. 하지만 에드워드 4세는 1471년에 다시 잉글랜드로 돌아와 반격에 나섰다. 결국 워릭 백작은 1471년 바넷 전투에서 전사했고, 복위했던 헨리 6세 역시 곧 살해되었다.

잉글랜드의 내전을 최종적으로 승리하고 확고한 통치자가 된 에드워드 4세는 1475년 프랑스를 침공했다. 그러나 루이 11세는 군사적 충돌을 피하고 외교적 수단을 통해 피키니 조약을 성공적으로 협상했다. 이 조약에 따라 잉글랜드 군대는 상당한 액수의 보상금을 받고 프랑스에서 철수했으며, 잉글랜드는 노르망디를 비롯한 프랑스 내 영토에 대한 권리 주장을 포기했다. 이로써 오랜 기간 지속되었던 백년 전쟁은 실질적으로 종결되었다고 평가받는다. 루이 11세는 자신의 아버지 샤를 7세가 무력으로 잉글랜드군을 몰아낸 것과 달리, 자신은 파테, 사슴고기, 그리고 좋은 프랑스 와인과 같은 외교적 선물과 협상으로 그들을 몰아냈다고 자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3. 이탈리아 문제 개입

1451년 2월 14일, 28세의 루이와 8세의 사보이의 샤를로트가 결혼하면서 프랑스가 이탈리아 문제에 본격적으로 관여하기 시작했다. 당시 이탈리아 반도는 베네치아, 밀라노, 피렌체, 교황령, 나폴리 왕국의 다섯 세력이 지배하며 정치적으로 경쟁하는 구도였다. 이 5대 강국 외에도 제노바토리노를 중심으로 한 사보이 공국 등 약 12개의 소규모 국가들이 존재하며 이들은 끊임없이 정책과 동맹 관계를 바꾸었다. 1454년 로디 조약으로 결성된 5대 강국의 연합체인 이탈리아 동맹조차 내부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였다.

루이 11세와 그의 아버지 샤를 7세부르고뉴 공국과의 오랜 갈등 때문에 이탈리아의 복잡한 정치 상황에 깊이 개입하기 어려웠다. 또한 잉글랜드와의 불화, 부르고뉴의 마리와 결혼하여 영토 상속을 노린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과의 대립 등으로 인해 이탈리아 문제에 집중할 여력이 없었다. 하지만 1477년 용담공 샤를이 사망하면서 부르고뉴 문제가 일단락되고, 1475년 잉글랜드와 피키니 조약을 체결했으며, 1482년 부르고뉴 상속 문제에 대한 평화적인 해결이 이루어지자 루이 11세는 마침내 이탈리아로 눈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루이 11세가 밀라노의 과부 공작 부인과 공작에게 보낸 편지; 1466년 7월 31일


이탈리아 국가들은 1477년 부르고뉴 공작의 죽음과 공작령의 약화를 프랑스 왕권 강화의 신호로 받아들였고, 이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국가들 간의 관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루이 11세는 사보이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보이의 전통적인 경쟁 상대였던 밀라노 공국프란체스코 1세 스포르차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이러한 관계의 일환으로, 스포르차는 1465년 공익 동맹 전쟁 당시 루이 11세를 지원하기 위해 아들 갈레아초 마리아 스포르차가 이끄는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이후 양측 관계에 균열이 생기면서 밀라노는 프랑스로부터 거리를 두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1477년 부르고뉴가 몰락하자 밀라노는 프랑스의 중요성을 다시 인식하고 루이 11세와의 관계 개선을 서둘렀다.

오랫동안 프랑스와 적대 관계였던 나폴리 왕국의 페르디난도 1세 왕 역시 프랑스와의 혼인 동맹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루이 11세는 또한 교황령과 새로운 우호 관계를 맺어 과거 교황들이 부르고뉴 공작에게 바쳤던 헌신을 잊었다. 1478년 1월, 그는 베네치아 공화국과 유리한 조약을 체결했다.

이탈리아 문제에 대한 프랑스의 관여는 루이 11세의 아들 샤를 8세에 의해 1493년에 새로운 수준으로 확대되었는데, 그는 프란체스코 1세 스포르차의 차남인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도움 요청에 응답하여 이탈리아 침공을 이끌었다. 이는 이탈리아 정치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4. 성격 및 평가

루이 11세는 아버지 샤를 7세의 중앙 집권화 정책을 이어받아, 백년 전쟁 이후 황폐해진 프랑스를 통일하는 데 크게 기여한 군주로 평가받는다. 그는 전쟁보다는 외교와 정치적 음모를 주로 활용하여 영토를 병합했으며, 이를 통해 국내 평화를 유지하고자 했다.[8] 이는 위그 카페 이래 프랑스 군주들이 활용해 온 《분할 통치》라는 전통적인 정책과도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인쇄술의 발전을 보호했고[5], 로마 교회로부터는 관대함을 인정받아 《지극히 기독교적인 국왕》이라는 칭호를 얻기도 했다.[6] 또한 양잠을 남프랑스에 보급하고 광산을 개발하는 등 산업 발전에도 힘썼다.[7]

부르고뉴의 용담공 샤를과의 대립 과정에서 루이 11세는 종종 봉건 영주의 전형과 맞선 근대 군주로 묘사된다.[8] 실제로 그는 샤를이 상징하는 기사도 정신에 대해 조롱과 경멸을 보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옛 관습을 진지하게 지키고 성유물을 열렬히 숭배하여, 동시대인으로부터 "신과 성모 마리아의 은총을 다른 어떤 군주보다 높은 가격으로 샀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배신을 서슴지 않았지만, 특정 십자가(성 로의 십자가)에 대한 맹세는 거부할 정도로 모순적인 신앙심을 보이기도 했다.[9]

젊은 시절 프라게리 반란에 가담했다가 실패한 경험은 그의 신중한 성격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제임스 클러는 이 경험을 통해 루이가 "단순한 허세만으로는 모든 것을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왕자로서도 왕으로서도 그 교훈을 결코 잊지 않았다. ...성찰 없이 순수한 충동에 따라 행동한 적은 결코 없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순록이나 큰 사슴 같은 희귀 동물 수집에 열중했으며, 심지어 칼라브리아의 은자인 파올라의 프란치스코까지 수집 대상으로 삼으려 했다. 로렌초 데 메디치와 서신을 교환하며 성 제노비우스의 반지나 신비한 식물(바라메츠)에 대해 논하기도 했다. 과학에도 관심을 보여, 사형수를 과학 발전에 기여하게 한 후 처형해야 한다는 칙령을 내리기도 했다. 1474년에는 신장 결석을 앓던 사형수의 생체 해부를 허가했는데, 이는 의학 발전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으나, 실제 치료법 확립으로 이어졌는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이러한 면모에도 불구하고 그는 미신을 믿고 점성술사들에게 둘러싸여 지냈다. 측근이었던 필리프 드 코민조차 연대기에서 루이 11세가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했다고 기록했다.[10] 시인 프랑수아 비용처럼 그를 찬미하는 인물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그는 이해하기 어려우면서도 복합적인 매력을 지닌 인물로 평가된다.

또한 루이 11세는 세계 최초로 당구대를 소유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적의 정보를 효율적으로 수집하기 위해 프랑스 최초의 우체국을 설립하기도 했다.

5. 사망과 유산

클레리-생트-앙드레에 있는 루이 11세의 묘지 조각상


루이 11세는 여러 차례 뇌졸중 발작을 겪는 등 수년간 병으로 고생하다 1483년 8월 30일에 사망했다. 그는 오를레앙 근처 클레리-생트-앙드레에 있는 클레리-생트-앙드레의 노트르담 대성당에 묻혔다. 그의 아내인 샤를로트 역시 몇 달 뒤 사망하여 루이 11세와 함께 안장되었다. 루이 11세의 뒤를 이어 13세의 아들 샤를 8세가 왕위에 올랐으며, 루이 11세의 딸인 안 드 프랑스가 어린 샤를 8세를 대신해 섭정을 맡았다.

루이 11세는 프랑스 통치 체제에 중요한 유산을 남겼다. 그는 정보 수집과 전달을 위해 1464년부터 프랑스 전역에 우편 중계망을 설치했는데, 이는 오늘날 프랑스 우편 서비스의 시초로 여겨진다. 또한 부르주아 출신 관료들을 적극 등용하여 왕국의 행정 조직을 정비했으며, 이러한 노력은 프랑스 혁명 때까지 이어지는 근대 프랑스 정부 조직의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경제적으로는 무역 박람회를 장려하고 도로를 건설 및 유지 보수하는 등 상업 활성화와 국가 발전에 힘썼다.

루이 11세는 전쟁과 계략, 교묘한 외교술을 통해 프랑스의 독립적인 봉건 영주들을 극복했으며, 용담공 샤를과 같은 숙적들의 몰락을 지켜보며 부르고뉴 공국 등 주요 영토를 프랑스 왕령으로 귀속시켰다. 사망할 무렵에는 프랑스를 사실상 통일하고 강력한 중앙 집권적 군주제의 토대를 다졌다. 이를 통해 프랑스가 중세 시대에서 벗어나 근대로 나아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루이 11세는 개인적으로 매우 미신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점성술사들을 가까이 두었다고 전해진다. 반면 과학에도 관심을 보여, 담석 제거 수술의 인체 실험에 참여하는 대가로 사형수의 형을 면제해 준 일화도 있다. 그는 말년에 플레시 레 투르 성에 은둔하며 지냈으며,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정치적 수완과 현실 정치(Realpolitik) 노선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평가는 엇갈린다. 특히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저서 《군주론》 제13장에서 루이 11세가 프랑스 고유의 보병대를 해산하고 스위스 용병에 의존한 정책을 근시안적이고 경솔한 결정이었다고 비판했다.

6. 자녀

첫 번째 부인 마거릿 스튜어트와의 사이에서는 자녀가 없다.

두 번째 부인 샤를로트 드 사부아와의 사이에서는 8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이 중 3명만이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했다.

이름출생사망배우자비고
루이1458년 10월 18일1460년왕세자, 요절
조아생1459년 7월 15일1459년 11월 29일요절
루이즈1460년1460년요절
1461년 4월 3일1522년 11월 14일피에르 2세 드 부르봉프랑스 섭정 (1483년 ~ 1491년)
1464년 4월 23일1505년 2월 4일루이 12세루이 12세 즉위 후 혼인 무효
루이1466년 12월 4일1466년요절
샤를 8세1470년 6월 30일1498년 4월 8일프랑스 국왕
프랑수아1472년 9월 3일1473년 11월베리 공작, 요절



또한, 루이 11세에게는 다음과 같은 서자가 있었다.


  • 잔 - 부르봉 공작 샤를 1세의 서자인 루이 드 부르봉과 결혼했다.
  • 마리 - 생 발리에 영주 아이마르 드 푸아티에(1510년 사망)와 결혼했다.

7. 가계도

번호인물관계
1루이 11세본인
2프랑스의 샤를 7세아버지
3앙주의 마리어머니
4프랑스의 샤를 6세친할아버지 (2의 아버지)
5바이에른의 이자보친할머니 (2의 어머니)
6앙주 공작 루이 2세외할아버지 (3의 아버지)
7아라곤의 욜랑드외할머니 (3의 어머니)
8프랑스의 샤를 5세증조할아버지 (4의 아버지)
9부르봉의 조안나증조할머니 (4의 어머니)
10바이에른 공작 슈테판 3세증조할아버지 (5의 아버지)
11타데아 비스콘티증조할머니 (5의 어머니)
12앙주 공작 루이 1세증조할아버지 (6의 아버지)
13블루아의 마리, 앙주 공작부인증조할머니 (6의 어머니)
14아라곤의 후안 1세증조할아버지 (7의 아버지)
15바의 욜랑드증조할머니 (7의 어머니)


참조

[1] 웹사이트 Louis XI king of France https://www.britanni[...]
[2] 서적 フランス史【中世】Ⅴ 論創社
[3] 서적 フランス史【中世】VI 論創社
[4] 서적 世界の名著55 中世の秋 中央公論社
[5] 서적 ヨーロッパ史 創文社
[6] 서적 ヨーロッパ史 創文社
[7] 서적 中世ヨーロッパ経済史 一條書店
[8] 서적 ヨーロッパ史 創文社
[9] 서적 世界の名著55 中世の秋 中央公論社
[10] 서적 復興期の精神 講談社文芸文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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